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고노스 왕조 (문단 편집)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멸망 ===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제7대,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기원전 179~기원전 168)였다. 페르세우스는 마치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지녔다고 하며, 성격이 호탕해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동생인 데메트리오스가 왕위 계승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자 아버지를 설득해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걸림돌이 없어진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 시대에 잃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열심이었다. 일단 필리포스 5세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트라키아, 일리리아 정복 사업을 지속했다. 또,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풍모를 활용해,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활용하여 자신을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자신이 로마의 손아귀로부터 그리스를 구해 내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다. 그러자 그리스 안에서 로마의 세력이 커져 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로도스 등이 그에게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역시 이런 움직임에 호의적이었다. 페르세우스는 각지에 있는 친 로마 세력을 견제하고 약화시킨 다음, 자신이 키워놓은 세력으로 대체해 가는 방식으로 세력을 불려 갔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다시 신장되자, 이번에는 페르가몬이 위협을 느껴 로마가 간섭하기를 요청해 왔다. 로마 역시 마케도니아의 부활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마케도니아에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대응하여 우선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를 거스르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안티오코스 4세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유린하고 알렉산드리아 포위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주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비록 안티오코스 4세의 지원이 없었지만,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초기에는 그리스인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서 전쟁을 그럭저럭 잘 이끌어 갔다. 허나 일리리아인이 지원을 끊자 서부 전선에 공백이 생겼고, 그리하여 로마군에게 쫓겨 마케도니아 남부의 피드나로 들어갔다.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양군은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마케도니아의 방진이 밀렸다. 피드나 전투에서 견고한 팔랑크스가 무너지는 순간, 페르세우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는 로마에 포로로 붙잡혀 가 여생을 알바 푸켄스에서 유폐되어 살았고, 이로써 안티고노스 왕조는 멸망하였다. 그래도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도자기를 구워 팔다가 라틴어도 배우고 공증인이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